본문 바로가기
썰·소설

[스팍커크] 타인의 삶

by RAYO. 2016. 10. 6.

사회주의 동독의 비밀경찰 스팍과 그가 감시하는 배우 커크. 영화 《타인의 삶》 패러디.

벽에 구멍을 뚫고, 콘센트를 뜯어낸 다음 초소형 카메라를 설치한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모서리를 따라 부착된 전선이 이곳 감시 대상의 집에서 윗층의 감시 초소로 이어졌다. 신속, 정확하게 설치를 끝내고 벽지를 다시 바르는 이들은 언뜻 여느 인부들과 다르지 않아 보였으나 실상은 대국민 감시 체제를 조성하고 있는 국가안전부-통칭 슈타지 소속의 요원들이었다.

집안 곳곳에서 빈틈없는 감시망을 형성하고 있는 카메라와 도청기들의 위치를 마크하던 감시 책임자, 스팍 중령은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13시 42분. 정보에 따르면 감시 대상이 오전 연습과 점심 식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것은 14시 30분 전후다. 슬슬 이 무단 침입자들이 철수해야 할 때였다. 물론 침입자들-슈타지는 그대로 집주인과 마주친다 하더라도 그들의 행위를 불법 침입이 아닌 적법한 수사로 만들 수 있었지만, 일단 그들의 현재 임무는 감시이지 수사가 아니었으므로 집주인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숙달된 요원들의 솜씨는 눈 깜짝할 새 공사의 흔적을 지우고 집안을 원상복구시켜 놓았다. 작업을 마친 요원들을 모두 내보낸 스팍은 다시 한번 현장을 점검했다. 수 대의 카메라와 도청기가 감쪽같이 숨겨진 벽을 훑던 그의 시선이 문득 한 지점에 가 닿았다. 서푼짜리 오페라 Die Dreigroschenoper. 연극 포스터였다. 신사 행세를 하며 거지 왕의 외동딸을 꾀어내는 강도로 분한 사내의 자신만만한 미소가, 젊은 패기로 타오르는 새파란 눈동자가 스팍의 눈길을 끌었다. 이번 감시 대상, 제임스.T.커크였다.

제임스.T.커크는 동독 서민들의 영웅이라 불리는 변호사, 조지 커크의 아들이었다. 가난하고 힘 없는 이들의 편에 섰던 정의로운 조지 커크는 모두가 외면하는 당의 적, 반사회주의 정치범들의 변호마저도 기꺼이 수락했다. 당은 그를 못마땅해해 은근한 압박을 가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고, 당의 압박 하에 살아가던 서민들이 그런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조지 커크가 변호를 맡았던 이들 중 한 명, 유명한 반사회주의 인사 크리스토퍼 파이크가 서독으로 망명하면서 그의 운명은 비극을 맞이한다. 이전부터 당에 의해 반사회주의자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온 그는 파이크와 그 동료들의 망명을 도운 혐의를 받고 처형되기에 이른다. 조지 커크의 아내 위노나 커크는 집요한 심문 끝에 남편의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어 결백하다는 판결을 받았다. 이후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그녀는 오빠의 집에 두 아이를 맡겨 버린다.

조지 커크의 처형과 위노나 커크의 석방 후 커크 일가는 당의 감시로부터 벗어난 듯했다. 서독으로 망명한 파이크가 제임스.T.커크에게 은밀히 연락을 시도했다는 정보가 입수되기 전까지는. 동독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의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파이크는 동독의 1급 요주의 인사였기에, 곧 제임스.T.커크는 조사 대상이 되어 그에 대한 모든 정보와 기록이 기밀 보고서로 정리, 작성되었다.

제임스.T.커크. 25세. 함부르크 태생, 베를린 거주. 극단 엔터프라이즈에서 배우로 활동 중. 무면허 운전과 폭행치상죄로 벌금형 기록 있음.

외삼촌 집의 천덕꾸러기로 자란 커크는 형 조지 사무엘의 가출 이후 본격적으로 엇나가게 되었다. 학교도 다니지 않고 방황하던 그는 극작가인 친구 레너드.H.맥코이의 권유로 배우 일을 시작했는데, 출중한 외모와 개성 있는 연기로 유망한 신인 반열에 올라 서서히 주목받는 중이었다. 커크 자신은 뚜렷한 정치적 입장을 취한 적은 없지만, 요주의 인물인 파이크와의 관계나 맥코이를 비롯해 당에 비판적인 몇몇 연극인들과의 친분을 고려해 당은 커크를 감시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 임무의 실행을 맡게 된 것이 스팍이었다.

제임스.T.커크의 감시를 스팍 중령이 담당한다는 것이 확정되었을 때, 국가안전부 정찰국 내부가 술렁였다. 1급 정치범이 아닌, 그와 연관이 있을 뿐인(심지어 정치적 연관이라는 증거도 없는) 신인 배우의 감시에 '그' 스팍 중령이라니. 수면 박탈과 암실 감금, 그 외 온갖 비인간적인 수단이 동원되는 슈타지의 자백 강요 체계의 완벽한 이해자라고 불리는 이가 바로 스팍 중령이었다. 임무가 없을 때면 교관으로도 활동하는 그는 생도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대신 용의자가 거짓을 말하게 하지 말라고 가르쳤고, 몸소 그 모범을 보이고는 했다.

코드명 HGW XX/7. '캡틴' 감시 사흘째. 이렇다할 수확은 없었다. 파이크와 연락하는 낌새도 보이지 않았고, 화려한 외모나 배우라는 직업이 주는 인상과는 달리 그의 생활은 수수했다. 오전 연습과 극단원들과의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면 귀가했고, 저녁 식사 후 잠시 근처를 산책했다. 그는 많은 시간을 집안에서 독서와 연극 비디오 감상, 테트리스를 하며 보냈다. 스팍은 커크가 소유한 서적과 영상물이 당의 열람 및 상영 제한 작품 목록에 포함되지 않음을 확인했다.

커크가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은 극작가 맥코이, 연출가 몽고메리 스콧, 극단 매니저 히카루 술루, 스태프 파벨 체콥, 동료 배우 니요타 우후라 정도로 그가 몸담고 있는 극단의 단원들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집에 초대하는 일은 드물었다. 스팍이 감시하는 집 안에서 커크는 언제나 혼자였다. 이전에는 클럽을 전전하며 밤놀이를 즐기거나 하루가 멀다 하고 상대를 바꿔 가며 집에 여자를 끌어들이고는 했다더니, 연극계에 발을 들인 후로는 탕아 생활을 청산하고 조용히 살기로 한 모양이었다.

스팍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쿵쾅대는 소음으로 가득찬 클럽에서 우연을 가장해 커크의 뒤에 바싹 붙어 음담패설과 저급한 플러팅이 9할을 차지하는 대화를 엿듣거나, 끈적하고 열렬하게 살을 섞는 행위를 지켜보며 날마다 바뀌는 상대에 대해 일일이 조사한다니. 물론 임무에 충실한 스팍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 모든 일을 완벽히 수행할 수 있었지만, 어쨌거나 그에게도 썩 달갑지 않은 일임은 분명했다.

'캡틴' 감시 일주일째. 여전히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스팍이 기록한 것이라고는 커크의 귀가 시간이 날마다 조금씩 늦어졌고, 저녁식사까지 극단에서 해결하게 되었다는 것 정도였다. <서푼짜리 오페라>의 재연 개시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극단 엔터프라이즈의 감시는 극작가 맥코이에게 붙어있는 감시자의 몫이었는데, 공연이 시작되면 요주의 인사들이 극장에 모일 확률이 높았기에 스팍 또한 감시 범위에 극단을 추가할 예정이었다.

밤늦게 돌아온, 지친 기색이 역력한 커크는 저녁 산책도 거른 채 거실 소파에 쓰러져 그대로 잠들고는 했다. 침실까지 몇 걸음이나 된다고 불편하게 저러고 자는지. 비효율적이군. 커크의 행태에 여느 때와 다름 없이 효율을 생각하던 스팍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여러 개의 명의로 모든 회차의 티켓을 구입한 스팍은 뒤쪽 좌석에 앉아 공연장 구석구석을 살피는 한편 감시 대상인 커크를 주시했다. 우선 구유에 앉아, 폴리. 오늘 이 마구간에서 저의 결혼식이 있겠습니다. 그가 뻔뻔한 강도를 연기하는 가운데 어두운 극장에서도 눈동자 한 쌍만은 새파랗게 빛나고 있다고 스팍은 생각했다. 공연 중이라도 객석의 누군가와 어떤 신호를 주고받을지 몰랐기에 커크를 면밀히 살피던 스팍의 시선은 어느 샌가 부드럽게 휘며 웃음짓다가, 악에 받쳐 성을 내다가, 한껏 조롱을 담아내는 다채롭게 푸른 눈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감시자가 감시 대상에게 사로잡히는 순간이었다.

국가안전부 정찰국의 기대와 달리 극단 엔터프라이즈의 공연장에서는 이렇다할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고 있었다. 몇 번째인가의 공연이 끝난 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극장에 남아 주요 배우들 및 스태프들의 거동을 주시하던 스팍은 커크의 행방을 눈으로 좇았다. 그러나 그는 커크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새 밖으로 나갔나. 누구와 함께? 파이크나 관련 인물과의 접선인가? 모든 가능성과 더불어 상황을 정리하며 극장을 나서려던 그의 어깨를 누군가 붙잡았다. 저기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익숙하다고? 위화감을 느끼며 뒤돌아본 스팍은 순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를 사로잡은 파란 눈동자가 눈앞에 있었다.

"제임스.T.커크예요. 알고 계시겠지만."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커크가 한 손을 내밀었다. 스팍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감시 대상과의 접촉은 임무에 포함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수상하게 보이는 것도 안 될 일이었다. 그는 남은 공연에도 꼬박꼬박 얼굴을 비춰야 했기 때문이다. 스팍은 마찬가지로 자기소개를 하거나 손을 마주 잡는 대신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벌칸은 악수를 하지 않습니다."
"아, 실례했네요. 미안해요. 내 행동이 당신을 화나게 했나요?"
"…아닙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꼭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음,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미스터…?"
"저와 이야기하고 싶은 이유가 뭡니까."

사근사근한 커크의 질문에 스팍은 대답 대신 단호한 추궁으로 답했다. 커크는 잠시 스팍을 바라보다가 곧 다시 미소를 띄우고는 입을 열었다.

"공연, 매 회 보러 오셨잖아요."
"그게 다입니까?"
"저를 뚫어져라 보셨죠. 한시도 눈을 떼지 않으셨어요. 심지어 공연이 끝난 뒤에도 요. 많은 관객들 속에서도 당신을 모를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들켰다. 스팍이 슈타지의 감시자란 사실도, 자신을 둘러싼 감시망도 커크는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를 지적당한 것만으로도, 스팍은 모든 것이 들통난 기분이었다. 비논리적이다. 국가안전부 요원으로 일한 이래 처음으로 스팍은 당황했다. 그런 그의 반응을 무뚝뚝하지만 부끄러움 많은 팬의 것 정도로 이해한 커크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럼 이제 이름, 알려줄래요?"
"…스팍, 입니다."

스팍, 가볍게 발음해 본 커크가 기분 좋게 웃었다.

"반가워요, 스팍. 만나고 싶었어요."

커크의 안에서 완전히 팬으로 자리매김한 스팍은 같이 조금 걷지 않겠냐는 그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우리집으로 가는 길인데, 걷기가 좋아요. 앞서 걷는 커크에게 스팍은 이미 잘 알고 있다고는 말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실례지만 직업을 여쭤봐도 될까요? 아, 잠깐, 대답하지 말아요. 한번 맞춰볼게요."

집게손가락을 세워 입에 대는 시늉을 한 커크는 다분히 과장된 몸짓으로 팔짱을 끼고는 추측을 시작했다.

"매 회 공연 보러 와 주셨는데… 평론가, 는 아닌 것 같고. 연극하시는 분 같지도 않단 말이죠. 분위기로 보면 공무원이려나? 공무원 월급으로 이렇게 연극 자주 봐도 괜찮아요?"

우리 티켓이 그렇게 비싼 건 아니지만, 키득거리며 덧붙인 그가 답을 바라는 눈빛으로 스팍을 올려다보았다.

"공무원 맞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공연을 매 회 보더라도 제 재정에 문제는 없습니다."

일단 거짓말은 아니었다. 국가안전부는 국가 기관이고, 연극 관람료는 스팍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빙고! 신나게 외친 커크가 다시 물었다.

"공무원이시면 어디서 일하세요? 주민등록과?"

이왕 접촉한 이상 신뢰감을 주는 편이 좋았다. 그리고 조사 결과 국민 신뢰도 1위의 공공기관은 우체국이었다. 이 사실을 떠올린 스팍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우체국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우편물을 분류하는 작업을 합니다."

졸지에 우체국 직원 겸 커크의 팬이 되어 다음에 또 이야기하자는 약속까지 하고 만 스팍은 커크를 보낸 다음 바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이제까지 커크의 일과로부터 그가 잠드는 시간을 추정한 스팍은 시간에 맞춰 감시 초소로 복귀했다. 오늘의 보고를 해야 할 때였다. '캡틴'과의 접촉, 대화. 실수를 인정하고 감시자의 교체를 요청할 것인가. 접촉을 보고하고 감시를 계속하겠다고 요청할 것인가. 후자는 성립될 리 없는 가정이었다. 스팍은 감시 카메라 너머, 오늘은 제대로 침대에서 자고 있는 커크를 보았다. 감긴 눈 속의 파란 빛을 눈앞에서 다시 한번 마주하고 싶었다.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욕망이 스팍의 안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스팍은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코드명 HGW XX/7. '캡틴' 감시 이주일째. 특기사항 없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