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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색의 갓슈!!

[제온갓슈] 너와 여명

by RAYO. 2022. 10. 9.

*다우완이 갓슈를 성 밖으로 내보내는 대신 성 안에 가둔 if
*둘이서 밤을 넘어 아침 해를 맞이하러 가는 쌍둥이
*上, 下 통합, 수정 재업로드


마계의 왕이 성 깊은 곳에 유폐했다는 둘째 왕자는 궁인들 사이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천 년 간 마계를 다스려 온 왕 다우완 벨이, 차기 왕 결정전을 불과 몇 년 남기고 늘그막에 얻은 왕자가 왕궁 기사들도 두려워하는 영재라는 건 마계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다. 다만, 왕궁 안에서는 그 이야기의 뒤에 따라붙는 소문이 하나 더 있었다. 대외적으로 왕의 후사는 뇌제라 불리는 왕자 하나뿐이지만, 사실 왕과 왕비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쌍둥이 형제이며, 그 중 둘째는 성 안 외딴 곳에 남의 눈을 피해 숨겨졌다는 것이었다. 고귀한 핏줄을 타고난 왕자가 무슨 연유로 죄인처럼 숨어 사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는데, 기형아나 백치라고도 했고, 이성이 없는 저주받은 괴물이라 그렇다는 괴담에 가까운 설도 돌았다. 뭐가 됐든 드러내 놓고 떠들기에는 불경죄로 목이 달아날 법한 이야기라, 둘째 왕자의 존재를 둘러싼, 진위가 불명확한 소문들은 흐릿한 연기처럼 성 안을 떠다녔다.

자신에 관한 소문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사자인 둘째 왕자, 갓슈 벨은 왕자라는 지위가 무색하도록 바닥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시간은 저녁을 지나, 사방에 깔린 어둠 속에서 갓슈는 금빛 눈동자만을 움직여 문 쪽을 향했다. 어둠이 싫고, 혼자 있으면 무서웠다. 이 어둠을 밝혀주는 건, 제 손을 잡아주는 건 창백한 작은 번개. 첫째 왕자, 형 제온이었다. 의식주에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말을 거는 일도, 눈을 맞추는 일도 없이 저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피하는 궁인들 사이에서 고립된 갓슈는 제온의 훈련이 끝나는 시간만을 기다렸다. 어린아이가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는 부모를 원망하거나, 저를 봐 달라 떼쓰며 울 법도 한데, 갓슈는 부모님에게도 사정이 있다고 되뇌며 꾹 참고는 했다.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결코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성 깊숙이 인적 없는 곳에 자리한 갓슈의 방은 지나칠 정도로 조용했고, 또 갓슈는 귀를 쫑긋 세운 상태였기에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까워지는 소리에 맞춰 셋, 둘, 하나, 중얼거린 갓슈는 마침내 환한 얼굴로 발소리의 주인을 맞이했다. 어서 오게, 제온! 성에 갇혀 매일이 지루한 갓슈에게 유일한 낙은 훈련을 마치고 몰래 저를 만나러 온 제온과 노는 시간이었다. 기사가 아닌 일반 궁인의 눈을 피하는 것쯤은, 전투 훈련을 받은 제온에게는 간단한 일이었기에 가능한 만남이었다. 고된 훈련으로 인한 피로도, 훈련 중 생긴 상처의 아픔도, 보고 싶었다며 갓슈가 저를 끌어안을 때, 그리고 상처에 입김을 호호 불거나 아픈 거 날아가라며 손짓할 때면 눈 녹듯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제온의 일과도 거의 공부와 훈련뿐으로 단조로웠기에 제온은 갓슈에게 방 밖 이야기를 많이 들려줄 수 없음을 아쉬워했지만, 책을 읽어주고, 인형놀이나 역할극을 하며 소소하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갓슈는 제온이 조그맣게 반짝이는 번개 불빛을 만들어 보여주는 것도 좋아했는데, 다우완이 갓슈의 마력을 봉인한 뒤 주술 사용도 훈련도 금지한 탓으로 갓슈에게 주술은 미지이자 동경의 영역에 속했다. 같이 태어난 쌍둥이 형제인데 다른 삶이 주어진 것에 불평하거나 질투하는 일 없이 순수하게 저를 따르는 갓슈를 보며, 제온은 말로만 듣던 다른 형제처럼 같이 밖에서 뛰어놀고, 대련도 하는 상상을 잠시 했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어 지워 버렸다. 제온은 따뜻한 갓슈를 끌어안고 같이 자거나, 혹은 갓슈가 잠들 때까지 곁에 있어주고라도 싶었지만,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다가는 궁인들의 의심을 사게 되니 늘 아쉬움을 간직한 채 제 방으로 돌아갔다.

제온의 성격에 대해 궁인들 사이에서는 사납다, 무섭다는 평판이 자자했지만, 의외라면 의외로 제온은 혹독한 수련을 비롯한 부친 다우완의 지시를 거스르지 않았다. 제온은 왕자로서의 의무에 충실했고, 궁 내의 평판도 제온이 망나니이기 때문이 아니라 왕가의 품격과 기준에 엄격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그런 제온의 예외가 갓슈였다. 갓슈는 부친 다우완의 금기와 다름없는 존재로, 시중을 드는 극소수의 궁인을 제외하면 누구도 갓슈에 대해 알아서도, 갓슈를 만나서도 안 되었고, 왕자인 제온조차 그 금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럼에도 제온은 일과 후 몰래 갓슈를 보러 갔고, 갓슈는 그런 제온을 기다렸다. 부친에게 순종적인 형제로 하여금 작은 일탈을 행하게 만드는 동기는 외로움이었다. 거대한 성에 살면서도 두 아이는 있을 곳이 서로의 곁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성에서의 생활은 추위나 배고픔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형제는 온기를 갈구했고 사랑이 고팠다.

방에 갇혀있기 싫다. 밖에 나가고 싶다. 갓슈가 마음 속에 꾹꾹 눌러담기만 했을 뿐,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소원을 이뤄준 이는 제온이었다. 머리카락을 갓슈의 형상으로 바꾸고 방에 두어 궁인들의 눈을 속인 제온은, 동생의 손을 잡아끌며 잰걸음으로 성 복도를 가로질렀다. 갓슈를 데리고 제온이 향한 곳은 후원이었다. 그곳은 왕족만이 드나들 수 있는 쉼터로, 미로처럼 자리한 돌담 주변으로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광경이 갓슈의 탄성을 자아냈다. 다과회를 여는 기간이 아니니 누가 들어오지는 않겠지만 혹시 관리인 등이 보이거든 숨으라는 당부와 함께, 제온은 갓슈에게 꾸러미 하나를 건넸다. 제온이 아침 식탁에서 슬쩍한 빵이며 과일 따위를 모아 담은 그것의 모양새는 엉성했지만, 갓슈는 처음 받아보는 도시락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일과가 끝나면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긴 제온이 떠난 뒤, 갓슈는 홀로 인적 없는 후원을 뛰어다니고, 나무를 타며, 다람쥐와 새들을 찾아 말을 걸었다. 제 방에도 이 작은 친구들이 함께라면, 하루하루 길고 지루하기만 한 시간이 조금은 나을까. 이내 갓슈는 고개를 저었다. 멀리 뻗은 숲의 주민인 이들을 저와 같이 방에만 가두는 건 역시 불쌍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아이의 상냥함이 덧없이 빛났다. 문득, 곁에서 놀던 새 한 마리가 멀찍이 날아가 버렸다. 단단하고 높은 성벽 너머로. 허가 없이 성문의 결계를 뚫고 나갔다가는 작은 일탈이나 장난으로 넘길 수 없는 소동이 일어날 것이었기에, 성 밖으로 데려가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제온은 말했다. 넓은 성에서 유일하게 제게 잘해주는, 다정하고 멋진 형. 저의 좁은 세상에 숨구멍을 틔워 주지만, 저와 마찬가지로 좁은 세상에서 외로워하는 형. 제온도 저도, 언젠가는 이 성을 나가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생각에 잠겨 하염없이 바라보는 성벽 위로 어느 샌가 어둠이 내려앉았다.

오늘 재밌게 놀았냐며, 이만 돌아가자고 부드럽게 말하는 제온에게 갓슈가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밖에 나온 기념으로 모은, 보물 도토리라고 했다. 보물인데 받아도 되느냐고 제온이 묻자, 데리고 나와준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라며 갓슈는 다부지게 웃었다. 그 후 성적이 부진하다며 방에 갇혀 책을 필사하게 되는 바람에, 혹은 훈련 시간이 배로 늘어나는 바람에 갓슈를 만나러 가지 못할 때 제온은 갓슈에게 받은 도토리를 만지작대고는 했다. 씩씩함 한편에 말간 외로움이 비치던, 갓슈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면서. 하도 쓰다듬은 탓으로 표면이 닳아 맨들거리는, 볼품없는 도토리. 당초 갓슈의 보물이었던 그것은 어느 순간 제온의 보물로 자리매김했다.

언제까지고 반복될 것만 같던 일상의 전환점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마계의 왕을 정하는 싸움. 100명의 마물 아이들이 인간계에서 왕좌를 놓고 겨루는 싸움에 대해, 갓슈는 제온을 통해 들은 적이 있었다. 자신의 의지로 자유롭게 주술을 사용할 수 있는 마계에서와 달리(갓슈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으나), 인간계에서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인간을 파트너 삼아, 인간이 가진 마음의 힘을 원동력으로 주술을 써야 한다고 했다. 제온은 어떤 인간이 파트너가 되든 싸움을 제패하고, 아바마마의 뒤를 이어 왕이 되겠노라 선언했다. 그때 제온에게 뭐라고 말했더라. 제온이라면 공부도 훈련도 매일 열심히 하니까, 훌륭한 왕이 될 거라고 했던가. 사실 갓슈는 왕 같은 건 어떻게 되어도 좋았다. 싸움이 끝나고 제온이 다시 제 곁으로 돌아와 주기만 한다면. 그런데 설마, 주술도 쓰지 못하는 제가 제온과 함께 그 싸움의 참가자로 뽑힐 줄은 몰랐다. 지금쯤 제온도 100명의 왕 후보 명부를 봤을 텐데, 제가 거기에 들었음을 알면 어떤 얼굴을 할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동생이, 매일 단련을 거듭해 온 자신과 같은 자격을 얻었음을 알면, 역시 화를 낼까. 이제 나 같은 건 보기 싫다고 하면 어떡하지. 초조한 가정을 거듭하는 갓슈에게, 답을 줄 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제온이 만나러 오지 않게 된 것 외에도, 갓슈의 일상은 변화를 맞이했다. 갓슈가 기억하는 한 처음으로, 아버지 다우완이 찾아온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의 매일 얼굴을 마주했던 제온은, 꼬박꼬박 갓슈가 잘 있었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묻고는 했다. 그러나 다우완은 갓슈에게 궁금한 것이 없는지 아무 것도 묻지 않았고, 갓슈는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다우완은 마력의 봉인을 풀겠노라 짤막하게 통보한 채, 갓슈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번개 모양의 낙인이 새겨진 자리였다. 언제였는지, 갓슈가 열이 나서 누워만 있을 때 제온이 이마를 짚어준 일이 있었다. 서늘하게 와 닿는 손가락에, 열에 들떠 몽롱한 의식으로도 기분이 좋았다가, 이마에 자리한 자국을 살며시 덧그리는 손길에, 머무는 시선에 어쩐지 서글픔을 느꼈다. 아버지의 손은 느리게, 무겁게 이마에 와 닿았고, 주름과 함께 그 얼굴에 깊이 새겨진 감정이 무엇인지 갓슈는 읽어낼 수 없었다. 마력의 봉인이 풀렸으니 주술을 써 보라는 지시에 갓슈는 제온이 보여줬던 번개 불빛을 떠올리며 정신을 집중했고, 이내 의식이 끊겼다.

의식을 되찾았을 때 갓슈는 다시 혼자였다. 갓슈에게 남은 거라고는 질리도록 익숙한 어둠과, 뒤통수를 울리는 얼얼함, 그리고 새 망토 한 벌뿐이었다. 아버지가 언질도 없이 두고 간 그 망토는, 갓슈가 지금 걸친 옷과 겉보기에 큰 차이는 없었다. 손에서 미끄러지는 감각으로부터 갓슈가 추측건대, 재질이 조금 다른 게 아닐까 싶었다. 그 외에는, 제온의 망토에 달린 것과 비슷한 리본과 브로치가 눈에 띄었다. 제온이 있었다면 아바마마가 새 옷을 주셨다며 자랑하고, 잘 어울리는지 물어도 보고, 제온과 꼭 닮은 옷이라서 기쁘다고도 말할 텐데. 제온은 이제 저와 형제라는 사실이 싫어졌을까. 풀이 죽은 갓슈를 그리운 듯한 체취가 감싸고, 시야가 일변한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잠시동안 갓슈는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새하얀 장막이 시야를 덮는가 싶더니, 눈앞이 깜깜해졌다가, 갑작스레 밝은 빛이 눈을 찔렀다. 갓슈가 눈을 찌푸린 채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자, 익숙한 온기가 주위를 둘러쌌다. 익숙하다고? 의문이 머리를 스침과 동시에, 무언가가 갓슈의 이마를 가볍게 건드렸다. 아. 이마와 이마를 맞대는 그 행위를 갓슈는 알고 있었다. 제온이었다. 자신이 여기 있으니 안심하라는 뜻이었다. 맞닿은 체온에 안도감과 함께 그간의 설움이 북받쳐 올라, 갓슈는 제온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숨죽여 살 것을 강요당한 작은 아이는, 목 놓아 울지도 못한 채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말없이 제 등을 토닥이는 제온을 향해, 갓슈는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화난 게‥ 아니었나? 화나지 않았어. 내가 싫어진 게 아닌가…? 싫어할 리 없잖아. 흔들림 없는 목소리와 온화한 눈빛은, 언제나 그랬듯 갓슈를 갓슈로 있게 해 주는 이정표와도 같았다. 모두가 저를 없는 아이 취급하는 미로 같은 성에서, 길을 밝혀 주는 하얀 빛이었다.

제온은 하얀 망토를 벗어 갓슈에게 둘러 준 다음, 갓슈를 푹신한 소파에 앉히고는 김이 나는 머그잔 하나를 쥐어 주었다. 따뜻한 우유였다. 몇 모금 홀짝이자 속에 온기가 퍼지며, 눈물과 떨림이 잦아들었다. 달구만.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꿀을 조금 탔는데, 달지 않은 게 더 좋냐며 제온이 갓슈의 기색을 살폈다. 아닐세. 맛있다네. 약간 기운을 차린 갓슈가 씩씩하게 답하고는 남은 우유를 마시는 동안, 제온은 갓슈를 찾아오지 못했던 수일간의 일을 들려주었다. 이제 인간계로 먼 길을 떠나는 왕자를 환송한다는 명목으로, 귀족들이 주최한 파티에 불려다녔다고 했다. 실상은 현 왕가의 여섯 살배기 왕 후보가 얼마만 한 자질을 갖췄는지, 귀족 가문의 후보들이 겨룰 만한 상대인지 캐고 품평하는 자리라 가고 싶지 않았지만, 왕인 아버지의 체면이나 귀족들과의 관계가 있으니 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 제온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또 왕 후보 명단이 발표된 후 귀족들의 눈과 귀 노릇을 하는 일부 궁인들에게 거취를 주시당한 탓으로, 갓슈가 있는 곳에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다고도 덧붙였다. 감시를 따돌리면 따돌리는 대로, 수상하게 여겨질 것이 뻔했으니.

제온이 드물게도 부루퉁한 얼굴을 한 데 대해 갓슈는 내심 놀랐고, 신선하다는 생각을 했다. 갓슈뿐만 아니라 성 안의 모든 이가 익히 아는 바로 제온은 왕자로서 역할을 다하는 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훈련을 비롯해 빡빡한 일과를 불평 한 마디 없이 수행해 왔기 때문이었다. 인간계행을 앞두고 제온도 조금은 들뜬 걸까. 싸움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왕이 되겠다고 비장하게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한 성을 떠나 이제까지 보지 못한 넓은 세계에서 보낼 나날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언제고 외로운 어둠 속에 갇힌 저를 찾아내 손을 잡아준, 동화 속 찬란한 왕자 같던(실제로 왕자이기도 하지만) 쌍둥이 형이 지금은 제 또래의 평범한 아이로 보여 어쩐지 웃음이 났다. 갓슈는 어른스럽고 책임감 강한 제온도, 아이다운 감정을 내보이는 제온도 좋았다. 제온이라면, 그저 다 좋았다.

제온이 갓슈를 데려온 곳은 자신의 방이었다. 망토를 이용해 순간이동한 거라고 했다. 동행이 있을 때도 순간이동이 가능해지기까지 오래 걸렸고, 갓슈를 빠르게 제 방으로 불러오기 위해 순간이동을 썼을 뿐, 놀라게 할 마음은 없었다며 제온은 겸연쩍은 기색을 내비쳤다. 제온의 망토를 돌려준 갓슈는 자신의 새 망토를 걸쳐 보았다. 브로치가 비뚤어졌다며, 제온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갓슈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었다. 거울에 비친 상처럼 꼭 닮은 차림이 된 제온과 저의 모습을 보고, 갓슈는 환하게 웃었다. 순간이동은 배우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마력으로 망토를 늘이거나 줄여 전투에 활용하는 건 비교적 간단하다며, 제온은 갓슈에게 요령을 일러 주었다. 망토를 몸의 일부라 생각하고 마력을 조절해 보라는 말에, 화장실에서 일을 보는 듯한 모양새로 끙끙대느라 갓슈는 망토가 아바마마의 애정이 담긴 선물이며, 값비싼 마법 천으로 만들어졌고, 마찬가지로 고가인 브로치만 멀쩡하다면 망토의 손상은 금방 복구된다는 제온의 설명을 귀담아듣지 못했다.

지나칠 정도로 길게 늘어나 버린 망토를 수습한 뒤, 왕 후보들이 인간계로 떠나기 전 마계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 깊어 갔다. 제온은 중요한 날이니 혼자 마음을 정리하고 싶다는 구실로 궁인들을 모두 물렸다고 했다. 형제가 함께 잠자리에 드는 첫 밤이었다. 제온도 갓슈도, 서로의 체온을 나눠 품을 채우는 밤이 오늘로 마지막이 아니기를 바랐다. 대화와 웃음이 잦아든 밤은 고요했지만, 쓸쓸하지는 않았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서로를 갈구하며 뒤엉켜 잠을 이룬 밤이 지났다. 갓슈. 부드럽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갓슈는 눈을 떴다. 졸음이 채 가시지 않아 눈을 비비는 갓슈에게 제온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두 사람분의 온기가 남은 침대에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갓슈는 제온을 따라 창가에 섰다. 동틀녘이었다. 잠든 세상을 깨우는 선선한 바람이 머리칼을 헤집고, 볼을 간질였다. 멀리 종달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창마다 두툼한 검은 커튼이 드리운 갓슈의 방에서는 누릴 수 없는 풍경이었다. 어슴푸레한 하늘에 말갛게 번져가는 빛이 쌍둥이의 뺨을 물들였다. 갓슈. 다시금 나직하게 불러오는 목소리에 돌아본 순간.

아아. 나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입술이, 겹쳤다. 쏟아지는 햇살에 숨을 쉬는 법조차 새하얀 태초로 돌아가고, 제온의 숨만이 갓슈에게 생을 불어넣는 듯했다. 두 아이의 입맞춤은 찰나에 가까웠지만, 영원처럼 느껴지는 애달픔이 그곳에 있었다. 꺼질 듯 섞여드는 서로의 호흡 속에, 한숨과도 같은 제온의 속삭임이 스쳤다. 갓슈.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해라. 우리의 입맞춤을 마음에 새겨라. 섬세한 손길이 금빛 뒷머리를 어루만지는 것과 동시에, 새까만 어둠이 시야를 삼키고 갓슈의 기억이 끊어졌다.

*

울창한 숲의 깊은 곳에서, 작은 아이는 갑자기 나타났다. 아이를 발견한 인물은 고고학 교수 타카미네 세이타로였는데, 유적 조사차 숲에 들어가더니 유물 대신 금발의 어린아이를 주워왔다며 동료 교수들은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가 숲 속에서 처음 발견됐을 때부터 서러운 울음을 그치지 않는 탓에, 세이타로를 비롯한 교수들은 육아에 힘쓰던 시기가 한참 지난 몸으로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사탕도 초콜릿도 거들떠보지 않던 아이는 점심 반찬이었던 방어 튀김에 유일하게 관심을 보였고, 한 조각을 입에 물려주자 겨우 울음을 멈췄다. 방어 튀김을 우물거리는 아이에게 어쩌다 그런 숲 속을 헤매고 있었는지를 묻자, 아이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아이는 제가 어디서 왔는지, 부모가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부모님을 잃어버려서 그렇게 운 것 아니었냐는 물음에, 아이는 무언가 아주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데, 그게 부모님인지는 모르겠다는 알쏭달쏭한 답을 내놓았다.

아이에 관한 유일한 단서는 갓슈 벨이라는 이름, 그리고 함께 발견된 붉은 책이었다. 책에 쓰인 문자는 고고학에 정통한 세이타로도 처음 보는 것이었고, 동료 교수들까지 동원해 조사를 진행했음에도 해독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인 아들 키요마로라면 다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그리고 따돌림을 당해 등교 거부 중인 그 키요마로를, 햇살 같은 반짝임을 품은 갓슈라면 바꿔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세이타로는 갓슈를 키요마로에게 보내기로 했다.

*

“나와라, 제4 주술!! 바오 자켈가!!!”

절박함을 담은 키요마로의 외침에 붉은 책이 빛을 발하고, 번개를 두른 금빛 용이 우레와 같은 포효를 내질렀다. 주술을 쓸 때 자신은 의식을 유지할 수 없었기에, 갓슈는 번쩍이는 빛이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모든 것을 지워가는 익숙한 감각에 몸을 맡겼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순간, 섬광이 터지는 듯한 충격과 함께, 무언가가 흐려지던 갓슈의 의식을 크게 뒤흔들었다. 번개. 번개가 친 것이다. 이성이 아닌 본능으로, 갓슈는 직감했다. 하지만 자신의 번개가 아니었다. 금빛이 아닌, 은백색 번개. 누구나가 두려워했으나, 외로운 어둠을 가르는 한 줄기 희망이었기에 저만은 동경하고 사모했던 번개. 나의 형, 사랑하는 제온. 그 이름을 떠올림과 동시에 밀려드는 기억의 홍수 속에서, 갓슈는 제온과의 마지막 추억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갓슈.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해라.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과 함께, 갓슈의 의식은 소용돌이치는 기억의 늪 아래로 가라앉아 갔다.

갓슈의 의식이 돌아온 것은, 바오 자켈가를 처음 발동했던 전투로부터 며칠이 흐른 뒤였다. 눈을 뜨자, 파트너인 키요마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젠가 제가 감기에 걸렸을 때는, 두고 가지 말라고 애원해도 매몰차게 학교에 가 버렸는데. 아직 멍한 정신으로도, 키요마로가 제 곁을 지켜주는 게 좋아 갓슈는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키요마로는 그런 갓슈의 모습이 어이가 없는지 눈을 흘겼다가, 걱정 끼치지 말라는 말을 툭 던지고는 마실 물을 가지러 주방으로 향했다. 그 사이 몸을 일으킨 갓슈는, 베개 옆에서 실로 봉해진 채 접힌 종이를 발견했다. 갓슈는 방으로 돌아온 키요마로에게 종이에 대해 물었지만, 키요마로 또한 그 종이가 언젠가부터 거기 놓여있었다는 사실만 알 뿐, 정체에 대해서는 짐작가는 바가 없다고 했다.

설마, 또 다른 마물의 도전장인가. 키요마로가 조심스레 실을 풀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인간계가 아닌 마계의 문자였다. 키요마로의 당황 섞인 시선을 받으며, 갓슈는 그리운 그 문자를 읽어나갔다.

갓슈에게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다는 건, 바오를 깨우고 마계에서의 기억을 되찾았다는 거겠지.

이제 너는, 네 기억을 빼앗은 이가 나였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이다. 네 기억을 모조리 지우고, 네가 낯선 인간계에서 떨며 헤매도록 만든 못난 형을 용서해 달라고는 하지 않으마. 허나 네가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에 관해서는 너도 알아야 할 때가 되었으니, 부끄러운 변명이나마 지금껏 네게 숨겨온 모든 비밀을 소상히 적어 밝히고자 한다.

이 모든 일은 바오라는 주술로 인해 일어난 것이다. 지금 네 안에 깃들었고, 마침내 깨어난 힘이지. 바오는 본디 아바마마가 지니시고 사용하셨던 것을 네게 물려주신 거란다. 그 힘은 아주 강력하지만 동시에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기력이 쇠하신 아바마마로서는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신 거야. 그리고 아바마마는 바오라는 힘이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셨다. 그 까닭으로 바오를 계승한 너의 존재는 철저하게 숨겨졌고, 마계에 있었을 때 너는 마력을 봉인당해 바오는커녕 하급 주술조차 사용할 수 없었지. 너를 희생양 삼아, 바오는 아바마마의 뜻대로 사라질 것처럼 보였단다. 네가 100명의 후보 중 하나로 선발되어, 왕을 정하는 싸움에 참가하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바마마는 네가 바오를 계승한 숨겨진 왕자라는 사실을 다른 마물이 알아채면, 너를, 그리고 네가 가진 바오를 악한 의도로 이용할 것을 우려하셨다. 그렇기에 네 기억을 지운다는 결정을 내리셨지. 그 결정을 집행한 건, 알다시피 나였단다. 아바마마의 지시는 네 기억을 지우라는 것, 그리고 책이 불타 네가 마계로 송환된 시점에 기억이 돌아오도록 장치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독단으로, 장치 하나를 추가해 두었어. 네가 바오의 힘을 지닌 주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기억을 돌려주는 장치였지. 아바마마는 바오가 너를, 나아가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까 봐 두려워하셨고, 나 또한 바오의 위험성에 염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허나 걱정이 되는 것 이상으로, 나는 네가 성장할 것을 믿고, 또 기대하고 있단다.

인간계에 도착한 뒤로, 나는 언제나 너를 지켜보았다. 물론 기억을 지웠으니, 직접 네 앞에 나타날 수는 없었지. 내가 머리카락으로 여러 가지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지금쯤이면 너도 떠올렸을 것이다. 네 책의 주인은, 어렴풋이나마 내 시선을 눈치챈 듯하더구나. 감이 좋은 인간이야.

아바마마는 왕으로서, 왕에게만 가능한 판단을 내리셨을 것이다. 나의 지식이나 안목은 아바마마에 비할 것이 못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까지, 누구보다 오랫동안 너를 봐온 경험을 토대로, 너를 믿는다는 판단을 내렸다.

때로 네가 크나큰 시련을 맞닥뜨렸을 때, 어쩌면 나는 곧바로 네게 달려가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는 둘이 함께 보았던 아침 해를 떠올리거라. 우리가 나누었던 입맞춤을 되새기거라. 너는 기나긴 밤을 넘는 법을 이미 알고 있단다. 몸이 떨어져 있더라도 내 마음은 항상 너와 함께할 것이다.

갓슈 벨. 사랑스러운 내 아우야. 이제 너는 성 깊은 곳에 숨어야만 했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아이가 아니란다. 나와 마찬가지로 너는 벨의 이름을, 가장 강한 번개를 타고난, 당당한 마계의 왕자다. 자부심을 가지고, 싸움 속에서도 굴함 없이 승리와 영광을 쟁취하거라.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마.

사랑을 담아,
제온 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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